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 2조원을 바친 이회영 6형제의 비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인 우당 이회영(1867~1932) 집안을 빼놓을 수 없을겁니다.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었죠.


현재 시가로 따지면 2조원의 대토지를 빨리 헐값에 모두 매각하여 현금으로 만들어 만주로 가서 독립군양성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조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 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 2조원을 바친 이회영 6형제의 비밀


1. 하루 한끼 먹기도 힘든생활



이회영은 44살이던 1910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운동의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던 것이죠. 평소 3끼 배불리 먹던 식생활이었지만, 일주일에 세끼를 먹을 만큼 매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2.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



우당의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두 쓴 이후에 상해에서 사망하게 되었고,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던 셋째 이철영도 병사하게 되었습니다.



넷째인 이회영은 무등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 중, 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 수상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이호영은 1933년 소식이 끊겼고, 유일한 생존자인 다섯째 이시영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 것이죠.



3.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



이회영은 일제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를 배격했습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한 사상적 선을 그었으며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이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 것이죠.



이회영은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추구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억압당한 자로서 독재에 저항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미의 민족주의를 지향했고, 독립후에도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강했던 이회영 6형제들은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이역땅에서 펼친 이회영 일가의 치열한 독립 운동의 모습과 정신. 명예와 책무를 위해 재산은 물론 형제들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는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