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가장 무서워했던 의열단 김원봉의 비밀 5가지

1910년 ~ 1945년 사이 우리 역사중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일제강점기를 겪게되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은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으며 영웅으로까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후 의열단 단장, 혁명간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 다양한 직위를 가지게 되었고, 독립을 위해서 노력한 장군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대표 독립운동가였던 의열단 김원봉 선생의 이야기를 몇가지 정리해봤습니다.

1. 피로 쟁취한 우리들의 자유

약산 김원봉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는 방법에 '폭렬투쟁'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자유는 피로 쟁취한 것이고, 누군가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잊지 못할 명언을 남겼습니다.


오직 노동자였던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폭렬투쟁만으로 일제를 몰아냈었고, 드디어 우리는 자유를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2. 일본의 공포대상이었던 김원봉

의열단 김원봉 선생은 일본의 두려워할수밖에 없었는데요, 그 이유는 폭탄 국내 반입의거, 부산경찰서장 폭사의거, 밀양경찰서 폭사의거, 종로경찰서 폭파본본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일제 밀정 처단의거 등 다양한 업정을 기록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의열단 김원봉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했었고, 일본 수장마저 김원봉을 체포하는데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3. 조선의용대 창설

사실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조선의용대 창설은 대한민국이 망한 뒤에 국제 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1942년 당시에는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의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게 되었고, 이때 조선의용대 주력이 중국 공산당인 연안 쪽으로 넘어가게되었지만, 이후 김구 선생의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간의 대통합을 이루는게 크게 기여했습니다.


4. 김원봉이 3일간 통곡한 이유

약사 김원봉 선생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 3일동안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47년 당시 김원봉은 친일파 세력인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지시로 인해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피체돼 갖은 수모와 고문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며 임시정부 계열이 좌우합작을 거부한것과 미군정에 협조한 것에 따른 벌이었다고 합니다.

5. 우리가 김원봉을 잘 모르는 이유

실제로 많은 역사연구학자들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독립운동가로써 백범 김구 선생과 김원봉 선생을 이야기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의 경우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지만, 김원봉 선생의 경우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1957년 북한 노동상에서 해임된 이후 9월을 끝으로 김원봉 선생의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역사서에서도 나오지 않고, 무엇보다 북한으로 넘어가서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이며, 결국에는 정확한 사인이 무엇인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습니다.

해당 직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남과 북이 서로 갈라지게 되면서 안타깝게도 일본과 가장치열하게 싸웠던 김원봉 선생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못내 아쉬움이 듭니다.